며칠 전, 한 젊은 목회자 한 분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왜 어떤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를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할까요?”
나는 한나 아렌트의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를 세계적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간의 조건』과, 정치와 악의 문제를 근본에서 다시 묻게 만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그녀의 문제의식을 조금이나마 접해 온 사람으로서, 그 질문이 왜 나에게 향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세 가지 활동으로 구분했다. 생존을 위한 노동(labor), 세계를 만들어가는 작업(work), 그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고의 활동인 행위(action). 이 세 가지가 바로 ‘인간의 조건’이며, 그중에서도 정치적 행위야말로 인간 존재의 정점이라고 말한 사상가가 바로 한나 아렌트라고.아렌트에게 정치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정치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며, 공적 공간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능력 그 자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정치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과연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현대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주권자인 시민을 대신해 정치를 수행할 대리인을 선출하는 대의민주주의를 기본 구조로 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 그 자체로 오해한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세계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분명하다. 선거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로 뽑힌 대리인들은 위임자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기보다,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해관계와 기득권의 논리를 앞세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의 소비자인 시민들이 정치의 생산자인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실질적 선택권 자체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우리 사회를 보자. 민주당 아니면 국민의힘. 그 외의 정당들이 존재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실질적으로 바꾸기에는 구조적으로 너무 미약하다.결국 우리는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정해진 틀 안에서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것이 과연 아렌트가 말한 ‘행위로서의 정치’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당이 제공하는 후보를 소비하는 정치가 아니라, 유권자 스스로 정치행위의 주체가 되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이다.다시 말해, 인간의 조건 중 최고 단계인 정치행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분명하다. 정당이 독점해 온 후보 선출 권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유권자 스스로 후보를 검증하고, 토론하고, 선택하는 정치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내년 지방선거는 그 실험을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다.
이는 단순한 선거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형식을 다시 묻는 질문이다.실패할 수도 있다.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지 않으면, 굳어버린 기득권 정치라는 물질은 결코 형태를 바꾸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완성된 해답이 아니라, 가소성을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실험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상징권력, 정당이라는 이름의 기득권,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논리를 해체하는 실험이 중단 없이 이어져야 한다.
유권자가 다시 주권자가 되기 위해, 정당정치에 예속된 후보가 아니라 시민이 만들어내는 정치가 가능함을 증명해야 한다. 정치는 전문가나 정치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치는 인간의 조건이며, 그 조건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정치는 다시 우리 손으로 돌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