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3일, 대한민국에서 발령된 비상계엄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 불리던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시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은 국민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비상계엄은 통상 전시나 대규모 재난 상황에서 발령되는 비상조치인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정치 체제의 근본적 위기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를 피 흘려가며 극복해왔고, 민주주의를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큼 성장시켜온 민족이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의 계엄령 시도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매우 무도하고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필자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민주주의는 정말 종착역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책이 최근 출간되었다. 김상준 교수(경희대 공공대학원)의 신간 『시민의회로 가는 길』이다. 필자는 이 책을 지난 주말 내내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시민의회’라는 개념은 언뜻 들으면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깊이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책은 그런 대중의 인식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김상준 교수는 지난 20여 년간 ‘시민의회’의 제도화를 주장해온 학자다. 그는 현행 대의민주주의가 마치 과거의 귀족정처럼 과두적 체제로 고착되고 있으며, 주권자인 시민의 의사가 제대로 정치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시민의회다. 저자는 고대 아테네의 추첨제를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정치 시스템으로서의 시민의회를 제안한다.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이 아닌, 무작위 추첨을 통해 구성된 일반 시민들이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함으로써 더 포괄적이고 숙의적인 결정을 내리는 ‘심의민주주의’ 방식이다.
사실 대의민주주의의 구조적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지적된 바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영국인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가 선거할 때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는 다시 노예가 된다”는 말로 대의제의 본질적 한계를 꼬집은 바 있다. 김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시민의회가 단지 이상적인 정치 모델이 아니라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실험되었고 성과도 있었던 실현 가능한 대안임을 책에서 입증하고자 한다.
책에서는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프랑스, 덴마크, 캐나다(브리티시컬럼비아주), 한국, 중국 등의 사례를 조명하며 시민의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각국에서 시행된 시민의회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고 이는 제도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시민의회가 일시적인 실험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이고 실효적인 정치기제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입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법제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과 저자의 집념이 책 전반에 녹아 있다.
『시민의회로 가는 길』은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다. 그것은 한 학자의 오랜 실천과 사유가 담긴 정치적 대안의 모색이자, 시민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실천적 제안이다. 저자가 그토록 외롭고 지난한 여정을 걸어온 ‘남이 가지 않은 길’은 이제 더 이상 혼자의 길이 아니다. 점차 많은 시민이 동참하고,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한다. 지금의 민주주의가 끝이 아니라, 새롭게 열릴 가능성의 문임을 이 책은 조용하지만 힘 있게 말해준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필자는 ‘새롭게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말을 붙였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는, 더 나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 그것이 바로 시민의회라는 이름의 미래이다.